신랑이 자취하려고 마련해 둔 역촌동 집은 결혼하면서 신혼집이 되어 8년을 살았고 우리 부부는 학생 때 집과 학교가 멀어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아이만큼은 학교가 가까우면 좋겠다며 아이 학교 바로 앞으로 이사해 지금은 구산동 주민이 되었다. 은평구에 산 기간은, 우리아이 나이와 같은 10년이 되었다.은평에서 살게 된 계기는 아이 때문이다. 맞벌이 때문에 친정집이 있는 김포로 이사를 해서 부모님께 육아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생각보다 일찍 회사에 복직하게 되어 아이가 18개월 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을 알아보다 소리나는어린이집을 만났다.내
흔히 서울 출신 사람들은 따로 고향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흔히 시골, 지방의 태어나고 자란 어떤 곳이라는 사회적 공감 때문인 듯합니다. 아무런 연고 없는 소백산 자락 시골로 사과 농사 지으러 내려와서 고향을 묻는 지역 분들께 “제 고향은 서울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 말은 듣는 이 에게, 또 가끔은 나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게 맞나?”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현재의 은평구가 대부분 경기도에 속해 있던 시절, 서대문구 홍은2동 산자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6년부터 함께한 은평구는 누가 뭐라 해도
1999년 1월 첫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두 달 전, 은평구 구산동 7번지 골목에 이삿짐을 풀었다. 구산동은 내 삶에서 고향 다음으로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함께한 곳이다. 그전까지 가까운 불광동에 살았지만 구산동이라는 동네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하루는 의료보험조합(지금의 예일여고 사거리 태평양 약국 2층)에 볼일이 있어서 이 동네에 왔는데 처음 와보는 장소였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 많이 와 본 곳처럼 따뜻하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달 뒤 부동산 아저씨 소개로 집을
1978년 3월 나는 불광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콧물 닦기 용 손수건을 큼지막한 오핀(주: 당시에는 핀 대신 오핀이란 표현을 썼음)으로 매달고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문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이었다. 아이들로 가득 찬 그곳은 황야의 무법자에 나오는 사막처럼 황량하고 삭막해보였다. 3월이었지만 볼을 에는 추위와 낯선 아이들 속에서 유치원 근처도 가보지 못 한 나는 장고가 쏜 총소리에 기절하던 말라깽이 엑스트라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낯선 교실에 호랑이 같은 선생님. 조금만 떠들었다가는 매서운
2010년 강북구 미아동에서 응암 3동으로 이사를 왔다. 사흘 뒤였을까. 이른 아침 혼자서 불광천에 갔다. 와, 진짜 신세계였다. 집 가까이에 이토록 아름다운 초록의 향연이 있다니! 강북구에 살 때는 결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마음에 빛을 얻은 것 같았다. 결혼하고 3년 만에 딸 하나를 겨우 낳고 녹내장을 앓았다. 그 뒤로 눈이 계속 안 좋았다. 은평으로 이사 와 사방으로 푸르른 불광천을 만났다. 초록 빛깔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불광천은 녹내장을 앓았던 눈의 피로를 줄여 주었고 눈에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그때부터 불광천은 나만
어쩌다 보니 백련산 자락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태어나 자란 곳만큼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취 생활까지 포함하면 21년인데,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불광동 산동네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예전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달동네가 남아 있던 그곳은 서울이라는 낯설음을 줄여주는, 친숙한 ‘동네’ 느낌이었다.북한산 자락도 그렇고 백련산 자락도 그렇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숲이 가까워 공기가 맑고 시원하고, 무엇보다 골목이 살아 있어 좋았다.골목이란 말에는 뭔가 정겨운 울림이 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
중학생이었을 때, 자전거를 처음 탄 기억이 난다. 형제들이랑 넓은 여의도공원으로 가서 하루 종일 자전거를 빌려서 탔다. 집에 돌아 갈 때쯤에는 불안하지만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는 정도였다. 그 후 몇 차례 탈 기회가 있었다.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조금 타다가 그만 두고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게 된 것은 40대 중반이 넘어서였다. 10년 전 즈음 성산동에서 살 때였다. 여의도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미리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직장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그 당시 매일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삶의 목표까지는 아니어도 다이어트는 내 삶에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살림(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하 살림)은 은평구청 소식지를 통해 채식 식단과 운동으로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는 '건강실천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살림은 무척 자주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처음엔 가정의학과 의원이 만들어져 갔고 이후엔 운동센터가 생겨 운동을 하기 위해, 나중엔 치과까지 만들어져 치과 검진을 위해 가게 되었다.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좋아하는 소모임 참여를 위해서였다. 좋아하는 인문학 공부를 하는 소모임에서 발제한 글을 읽
702번 버스를 탄다. 시계입구 가게 앞 검문소에 내린다. 식당 몇 군데를 지나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끝난다. 도로 끝에 주차장이 있다. 그 사이에 숲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 그곳에서 봉산이 시작된다.처음엔 조금 오르막길이 있다. 어른들끼리 간다면 그다지 힘들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오르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짧은 오르막 뒤에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숲길을 지나면 이런저런 식물과 곤충, 동물을 만난다. 나무나 꽃에 밝은 사람도 있지만 나는 영 깜깜이다. 처음 갔을 땐 정말 하나도 몰랐다. 그저 이건 나무,
도서관으로 놀러가자현관을 열고 넓은 대로를 건너 대조초등학교를 끼고 돌아 조금만 더 걸으면 만날 수 있는 곳.“자박자박 삐걱삐걱.”마루처럼 넓게 깔아놓은 널빤지를 지나 깔끔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신발장이 가지런히 놓인 현관이 나타난다.“드르륵.”신발을 벗고 중문을 여니 그림책들이 자태를 뽐내며 나를 반긴다.인연이 닿아나와 대조꿈나무도서관과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만고만한 아이 셋과 아웅다웅하며 지내던 당시 책을 읽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대조동 동사무소 한쪽에 있던 꿈나무도서관이었다. 집에서 가까웠고 자주 찾
은평구에 거주한 지도 어언 13년. 가장 추억이 많을 학창시절을 여기서 보내지 않은지라 별로 기억에 남을 장소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마음에 남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진관동에 살았지만 지금은 아기엄마가 되어 일산에 사는 만화가 친구와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으며 만화 아이디어를 나누던 메뚜기 다리, 시험 준비를 위해 드나들던 은평구립도서관, 부모님과 산책 다니던 둘레길 등이다. 그러나 한 장소를 골라보라면 역시 불광천을 꼽게 된다. 이곳은 나의 평생의 숙원인 다이어트의 한이 올올이 서려있는 곳이자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멋진
은평구에 처음 발을 디딘 날, 나는 낡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집 같은 걸 절대 소유할 것 같지 않던 친구가 녹번동에 집을 샀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덧붙여 친구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사할 집이 많이 낡아 수리를 하고 있는데 페인트 칠을 도와 달란다. 같은 과 선후배인 우리 무리는 불러 낼 힘센 남자는 고사하고 손끝 매운 남자도 곁에 두지 못했으니 그 일은 온전히 어리바리한 우리들의 몫이었다. 구름이 말을 할 것 같은 하늘이었다. 가을 날씨가 청명했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 간질간질했다. 어디론가 떠나 파란 하늘을 그윽히 쳐다보
첫경험. 짜릿하고 희열이 넘쳤다.그 처음의 순간, 나는 소리를 질렀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내 딴에는 그럴 만했다. 첫 자취의 순간이었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오매불망 바라던 자취집을 얻은 곳은 은평구 독박골(불광동)이었다.수십 군데 발품을 팔았고, 1998년의 봄, 지상의 방 한 칸을 얻었다. 오래된 연립주택 2층, 작고 아담한 내 공간. 나는 독박골에서 내 청춘의 시즌2를 시작했다. 이사했던 그날은 아직도 선하다. 친구 3명을 불러 이삿짐을 나르고 짐을 풀었다. 북적북적 몸을 움직였